이번이 몇번째더라...
오늘도 결국 공과금을 안냈다.
전기세 월말까지 안내면, 전기를 끊겠다는 한전의 으름장이 배달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저번달에는 두번째로 가스가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첫번째 끊겼을때는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두번째 끊기니 허탈하더군.
근데 문제는 끊긴 그다음날도 다시 복구해야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지나고 말았더랬다.
그래서 결국 아침에 일어나 씻으려고 근처 사우나를 가야했다는...

이번엔 전기다.
전기가 끊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지.
PC,TV,전등,전자렌지,커피포트,드라이기,다리미가 불가함은 물론이요.
보일러도 돌아가지 않아서, 역시나 씻는데 불편이 생길수밖에 없겠군.

이 일상을 전혀 챙겨보지 않는 일상방치증후군...그냥 게으름이라고 하자.

아마도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이사온지 1년도 넘었음에도 동사무소에 이사했다는 신고를 안해서,
현재 민방위훈련, 지방세통지서 등등 아마도 이전주소로 쌓이는
나와 관련된 국가의 부름은 켜켜이 먼지만 켜고 있을듯

게으름은 곧 돈으로 보상할 수밖에 없을터,

게으름은 쓸데없는 낭비를 낳고,
그 낭비는 내 일상의 쿠알러티(quality-늘 내가 콸러티라고 발음한다고 놀리는 몇몇이 있지..ㅡ.ㅡ;), 암튼 그 삶의 질이란것이 낮아질수밖에 없는 것,

또한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적잖이 실망하고,
피로해하는 사람들이 있을터,,,,

흠...일상방치증후군-이 지독한 게으름을 어찌할까나.

:

영화 '타인의 삶'

film 2007. 4. 23. 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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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중인 비즐리 (울리쉬 뮤흐)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다.다음탑에 1-2주 계속 평점 1위인것이 오히려 못마땅하기도 했다.
오랜만의 독일영화라는 신선함에 대한 기대 하나로 예매를 하는데,
벌써 많이들 내렸거나, 하루에 1-2회만 상영을 하다보니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거의 7-8년만에 명보극장을 찾았다. 언젠가 명보극장이 개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것 같은데
근래에 가본 극장중 가장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는 극장이었던 것 같음.
의자에서 전해지는 지하철 3호선 지나는 진동이며,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치고, 런닝셔츠를 드러내놓고, 바닥을 빗질하고 다니는 아저씨,
한적한 매점 등등 극장이 주는 포스가 10여년 전을 그대로 느끼게 하더군.

영화는 제대로 건축된 푸랑크푸르트 다리같은 느낌이었다.
튼튼함이 강하게 느껴지고, 감정은 최대한 자제되어있는듯하지만,
사람들을 푸근하게 지켜봐주고 있는 듯한 기분...

엿보기는 이미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있다.
또 의외로 우린 엿보여주기에도 또한 능숙하다.
그것이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나마 개인의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할 뿐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 까지꺼 그냥 닫으면 끝일 수도 있으니까.

허나 영화는 권력에 의한, 권력의 왜곡된 욕망에 의한 엿보기의 섬뜩함을 이야기한다.
엿보기를 당하는 작가 그라이만은 그나마 동독에 남은 몇안되는 체제를 옹호하는,
그 체제 속에서의 이상을 지향하는 작가임에도 도청과 감시 속에서 사적공간을 점령당한다.
그렇게 이상적인 체제를 향한 개인의 감시마저도 공감 받기 어려운 것인데,
게다가 그 감시를 지시한 장관은 사실은 그라이만의 연인, 크리스탈을 소유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에 의한 것이다.
국가와 체제에 대한 이상화, 그 이상화의 탈을 쓴 욕망을 감독은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낸다.
장관이 크리스탈을 겁탈하는 장면은
지금까지 본 영화속 강간장면 중 가장 낯뜨거웠다고 해야하나...정말 욱하니 먹은게 올라오는 것 같은, '돌이킬수 없는' 에서 모니카벨루치의 지하도 장면 다음으로 가장 역했었다.

그러나 그 섬뜩함 속에서도 인간은 또 다른 방향의 진화를 경험하기도하지.
영화 속에서 엿보기의 주체를 맡은 비밀경찰간부이자, 비밀경찰 도감청강의 교수인 비즐리는 서서히 엿보기 대상에 의해 오히려 해체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이 읽는 브레히트의 시에, 그들이 나누는 사랑에 깊은 감정의 울림을 경험하고,
점점 엿보기가 아닌 현실 생활에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려 한다.
 
좁은 어깨에 군더더기 없는 복장으로 팔도 제대로 흔들지 않는 정적인 표정과 자세가 그의 고독을 절절하게 만든다. 비즐리가 도청을 시작할때부터 작가와 연인이 관련된 장면에서는 관객인 나는 비즐리가 된다. 그들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든 장면들을 비즐리가 보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내가 곧 비즐리가 된듯한 불편함을, 또 동일한 감정선을 붙잡고 가는 동지적인 관계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즐리가 첨으로  몸을 파는 여인을 불렀다가 돌아가려는 그녀를 붙잡고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부탁할때, 나도 역시 낯이 뜨겁기도 하고, 또한 그가 한없이 비루하고 짠해보이기도 하더군.

독일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인지,
내가 볼 정도이면 이미 많이 필터링 된 영화이기 때문인지,
한번도 실망해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바그다드카페, 베를린 천사의 시, 노킹온헤븐스도어...









:

힘빼기...!!!

etc. 2007. 3. 27. 01:27 |

너무 힘주고 살지 않았나...?

겉으론 허술한척 하지만, 안으로는 사실 꽁꽁 자신을 싸매고,
세상과의 벽을 조금씩 높여오지 않았나...?

또다른 밤이고,
색다른 뭔가가 지나갔네.

위대한 아이들은 그들이 그렇게 커가게된 분명한 이유가 있어보이더군.
내가 그러한 짓(?)거리들로 시간을 매우는데에도 역시 이유가 분명 있었을터,

오랜만에 아주 늦고 늦어 또한 빠른 퇴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끄적거리고 감.

:

요즘 젤 많이 듣는 노래중 하나인듯,
이렇게 애절하게 돌아와 달라 말할만한 사람도 없고,
'빛과 소금'의 노래 중에 원래
'내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를 베스트오브베스트로 꼽았었는데,
요즘 참 주책도 없다 싶을정도로 이유없이 이 노래를 즐겨듣게 되는군.

가사를 한번 볼까...?


사랑했던 이유만으로

            -  박성식 작, 박성식 곡

기나긴 장마처럼 지루했던 얘기였나
우리의 못다한 사랑은
          
짧은 소설처럼 아쉬움만 남겨놓은
우리가 다 못그린 그림은
          
지나간 세월속에서 추억으로 남아
비가 오면 아파오는 그런 상처일 뿐야
       
내게 돌아와줘 나를 미워하지마
너를 사랑했던 이유만으로 아프긴 싫어
내게 돌아와줘 나를 미워하지마
너를 사랑했던 이유만으로
외롭긴 싫으니까
          

이렇게 독백하는 사람 참 쓸쓸하겠다.
자신과의 사랑이 끝도없이 내리는 비처럼 지루했었나라는 독백,
그렇게까지 그 사람은 멀어져버린 것이지.
 
빛과 소금은 요즘 공연 안하나...

:

샨사의 측천무후 읽기

book 2007. 3. 21.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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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사의 측천무후

샨사의 소설 중에 두번째...

어제 팀애들과 책이야기하다가 한참을 이 소설에 대해 떠들어댔다.

책과 그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말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쁘면서, 말이 막 꼬이는 나를 발견한다.
그 소설의 느낌, 소설이 주던 긴장과 희열에 대한 기억이 온통 얽히고 섥혀서 잘 정리되지 않을 뿐더러,
그저 '괜찮았다'는 느낌만은 너무나 강렬히 남아있어서,
그 기분을 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까지 섞여드는 그런 나,

이 책의 측천무후가 얼마나 불행한 성장기를 거쳐, 냉혹하지만 위대한 여황제가 되고, 이를 후대가 의도적인 오해를 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 보다는,
측천무후의 열정적이면서도 냉혹한 사고와 행동방식들이 흥미로웠다.

가끔 소설을 덮고 빠져나올때, 난 늘 이 작가의 손에 너무 긴장된 채로 붙잡혀있었다는,
그래서 갑자기 힘이 빠지고 허탈해지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이 소설이 날 2도쯤 몸을 데우고 있었다고 해야하나.

이렇게 살기에는 난 너무 멀리 와버렸지만, 가끔은 샨사체(?)로 내 스스로에게 독백하는
날 발견하며 우스워하기도 한다.

ㅋㅋㅋ

:
목포에 가본 적이 있다.
단 한번...
근데 이렇게 까마득하게 먼이야기인것 같고,
또 아무런 기억이 안나는 하루가 있다니...

94년 여름, 후배녀석이 고향집, 목포 바로 건너편 섬에 내려와 있었고,
난 같은 전라도 순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만나기로하고,
목포로 갔었다.

녀석이 섬에서 나온 그 선착장, 그 어딘가에서
여름 한낮 햇살을 받으며, 맥주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던 기억
시멘트 바닥에 놓아두었던 종이컵의 그림자만이 너무 선명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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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 < 출처 : 훌리건 카페 >


후배는 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고,
나 혼자 목포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유진이한테 편지를 썼던가...

하루종일 녀석과 나는 무슨 짓을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네.

후배녀석은 요즘 통 연락도 없고,
그날 하루의 기억은 사라지고 나니,

정말 내가 거길 갔다왔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군.

누군가가 쓴 포스트에서 목포라는 단어를 보고 갑자기 떠오른
사라진 목포의 기억...ㅡ.ㅡ;



:
좋아하는 배우가 상을 받는 것 역시나 내가 받은 것 만큼 기분 좋은 일이다.
포래스트 휘태커가 상을 받았다. 그것도 아카데미 주연상,
괜히 '미국'이래서, '아카데미'라서 깍아내릴 필요가 없겠지,
당연히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니까.
90년대 초반 내겐 나름 강렬했던 사람이,
한동안 잘 안보여 내내 아쉬웠는데, 잘됐다.  참 잘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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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휘태커



Daum 영화에
이 사진 밖에 없네.
그동안 그만큼 관심을 못받았었다는 반증이겠지.

다시한번, 크라잉게임이나 스모크를 한판 봐줄까봐.

:

이거 예전에 본적있는데 다시 보니 직접 해보고 싶네...^^

책은 일단 '수잔 손탁'의 '사진에 관하여',
23페이지 다섯번째 문장은...

은밀히 작동하는 자신의 취향과 의식에서까지 벗어날 수는없다. 1930년대 말 미국 농업안정국의 사진 프로젝트에 참여한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들(워커 에반스, 도로시아 랭, 벤 샨, 러셀 리 등등)조차도 자신의 피사체였던 소작농의 정면사진을 수십 장씩 찍었을 것이다. 피사체의 표정을 필름에 제대로 담았다고 만족할 때까지, 그러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빈곤, 존엄성,착취,빛의밝기,짜임새,기하학적 형상 등의 관념에 부응하는  그 무엇인가가 피사체의 얼굴에 명확히 드러났다고 여길 수 있을때까지 말이다. 사진작가는 사진이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호하는 노출 방식이 있기 때문에, 피사체에 특정한 기준을 들이대기 마련이다. 카메라는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는 생각도 존재하지만, 사진도 회화나 데생처럼 이 세계를 해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아의식을 싹 없앤 채 비교적 별다른 생각 없이 아무 것이나 사진에 담는다해도,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에 내재된 뭔가를 가르치려는 태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행위의 수동성 (그리고 편재성),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진이 우리에게 건네주는'메시지'이자 사진이 드러내놓는 공격성이다.

난 아직 카메라라는 도구에 대한 이해수준이 너무 낮아,
모든 결과물들은 기껏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을 선택하고, 내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대한 판단 등,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해석하는 것'으로 등치시키기는
조금 무안한 마음마저 들기도 하네.
어쨋든 수전손탁의 거침없이 휘갈겨대는 저 글쓰기 솜씨에 그저 멍하니 젖어있을 따름이다.
사진의 공격성...
임의로 선택하고, 맘대로 해석하고나서는 그 자체를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사진의 기제,
헌데 그 맛에 다들 사진 찍는 거 아냐...!!!

으...잠안와~~!!!

:
다시 포스팅하기로하고서는 또 20일을 그냥 보냈네.

나도 외삼촌이 되었다. 조카가 생긴것...흠...기분 묘하네.

이름은 내가 지어줘야지.
:

게으름의 끝

etc. 2007. 1. 26. 23:56 |
아무래도 글쓰기의 게으름에서 헤쳐나올 때가 된것같다.
시간은 강처럼 흘러간다.
조금은 폭이 넓은 곳을 한가로이 노닐며 떠다니는 때도 있을것이고,
때론 폭이 좁은 급류 위를
나는 듯이 스쳐지나가는 시절도 있는 것이다.

그래 좀 급히 떠다니다,
정신 못차리고 헤메이고 말았다.

이제 꽝하고 포스트 하나 찍었으니,
좀더 세상으로 나아가 소통할지어다.

: